<뉴-모던 타임즈 : 시스템, 커뮤니티, 그리고 개인>
큐레이터 박제언
∩모던 타임즈
콧수염 난 남성이 나사를 조인다. 나사를 조이고 조이고 또 조이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나사로 보이는 지경에 이른 그는 결국 나사와 하나가 되어 톱니바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1936)의 한 장면이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기계적 노동을 반복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근대시기 산업화의 과정에서 물화되는 개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풍경이 그리 낯설지 않다. 아침 8시면 지하철에 몸을 맡겨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사무실, 작업대 혹은 다른 어떤 공간에 몸을 앉히는 우리 모두는, 드라마 <미생> (2014)속 장그래를 닮아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도구화 되어가는 인간과 그 구조에 대한 비판을 다룬 문학과 작품들, 그리고 SNS 속 자조 섞인 게시물에 공감하던 중에, 드라마 미생 속 날선 대사가 꽂힌다. “회사가 전쟁터라고, 회사 밖은 지옥이야.”
∈시스템
지옥을 피해 전쟁터로 출근하는 우리에게 시스템이란 여전히 차악으로 불가피하게 선택한 전쟁터이고, 컨베이어 벨트 일 수밖에 없을까. 김준서 작가는 이에 대해 조금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의 초기작 <직장인 근성> (2008) 시리즈에서 작가는 늘어선 독서실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공부하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그 너머로 아득히 보이는 액자 속 글씨를 목격하게 한다. “직장인 근성을 버리지 않으면 젊은이에게 미래는 없다.” 작가는 이 글을 학교 운동장에 석고가루를 이용해 거대하게 새겼고, 누군가 의해 글씨는 소멸되어 흔적만 남았다. 미래를 가진 젊은이로 남기 위해 버려야 하는 ‘직장인 근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는 이러한 질문을 <열쇠 장기+풍경> (2020)을 통해 이어간다. 작가는 열쇠공 노인과의 대화를 통해 노인의 삶을 듣는다. 노인은 평생 열쇠를 만들어 왔고 늘 같은 시간 같은 곳으로 출근하여 열쇠를 만든다. 어느 날은 장사가 되지 않을 수도 있고 만들 열쇠가 없는 날도 있다. 그래도 노인은 어김없이 출근하여 작업실 책상에 앉아 이미 만들어놓은 자물쇠를 떼어내어 다시 분해하고 재조립하기도 한다. 작가는 이러한 노인의 삶을 열쇠를 사용하여 만든 장기판과 열쇠를 달아 만든 풍경으로 재현하며 ‘매일 무언가를 한다.’는 행위와 그것에서 오는 개인의 존재 증명에 귀 기울인다.
개인과 시스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2022년에도 이어진다. 작품 <난외>(2022)는 61개의 dc 모터가 모여 흐르는 물결을 만들어내며 유닛(개인)으로 이루어진 메스(집단)의 관경을 연출하며 개인들이 모여 이루어진 거대한 집단의 형상을 아름다운 유속의 흐름과 자연의 풍경으로 은유하였다.
⊂ 합창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 <Meta Chorus>(2023)는 어찌 보면 2022년에 발표한 <조각가 정영호>(2022)에서 보여준 메타휴먼으로 재현된 개인을 재료 삼아, <난외>(2022)에서 사용한 방법론인 개체의 모임으로 나타나는 거대 군체의 조화를 표현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Meta Chorus>에서 작가는 26인의 메타 휴먼들로 이루어진 합창단의 모습을 통해 개인과 집단, 그리고 집단에 소속된 개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각 프레임 속 메타 휴먼들은 고요한 옛 교회 건물 안에서 관객을 기다린다. 관객이 등장하기 전, 그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입술을 작게 오므리거나, 멍하니 서있거나, 혹은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군체의 하모니가 시작되기 전 개체들의 긴장된 순간은 어쩌면 학교, 직장 또는 다른 형태의 시스템으로 입장하기 전의 우리의 모습을 닮아있다.
센서에 관객이 인식되는 순간, 작은 호흡과 함께 합창이 시작된다. 각자의 위치에서 노래하는 메타 휴먼들은 높고 낮은 음으로 하모니를 이루어 간다. 모여진 개인들의 음은 부분이기에 거대한 전체가 되고 공간 안에 울리며 아름다운 흐름으로 관객을 감싸 안는다. 집단에서 맡은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회사라는, 가정이라는, 가게를, 공간을 유지하고 살아있게 하는 모든 존재들에게 작가가 헌사하는 헌정곡과 같은 음악을 관객은 감상하게 된다.
작가는 본 작업의 중심 주제인 ‘합창’을 그러나 ‘개인들이 조화롭게 모여 만드는 하모니’라는 낙천적인 방식만 인식하고 있지는 않다. 작가노트에서 그는 “어린 시절 그 합창단 속에 속해서 규칙을 따라 해야만 하는 공간 안에서 시간적인 속박까지 더해져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불편하다는 느낌과 타자가 나를 평가하는 시선의 존재에 대한 부담감까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어찌 보면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관객에 의해 음악이 시작되기 전, 긴장되고 한편 불안해 보이기도 하는 개체들의 모습에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중 어떤 메타 휴먼은 아주 평온한 표정이고, 또 장난스러워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마치 담임선생님이 교실문을 열고 들어오기 직전, 신학기를 맞이하는 학생들의 다양한 군상과도 같이 말이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어린 시절 사회 시스템으로 첫 발을 내디뎠을 때처럼 현재의 새로움이 낯설고 어색하다는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중략)... 사회 시스템 속 인간의 다양한 측면과 경험을 연출하는 무대를 지향하는 것이다.” -작가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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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료분리대
작가 김준서는 집단과 거기에 소속된 개인들의 이야기에 주목하듯, 늘 경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였다. 개체와 군체, 예술과 기술, 현실과 가상, 아날로그와 디지털과 같이 서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을 엮어내고 접합시키는 작품의 특성은 작가의 매개자적-그의 언어로 말하자면 ‘재료분리대’적-기질에서 기인한다.
“재료분리대는 서로 다른 재질이 만났을 때 두 경계를 나누면서 동시에 마감하기 위한 건축재료의 일종이다. 화장실과 거실에서 볼 수 있는 문틀, 화단과 복도를 가르는 콘크리트 블록처럼 서로 다른 재질이 서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재료분리대의 기능이라 할 수 있다. 재료분리대의 재미있는 점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지만 서로 다른 재질이 공존할 수 있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나는 스스로를 재료분리대라고 생각한다.” -작가노트-
작가는 재료분리대로서 섞이지 않는 이질적 소재들을 잇고 매개하여 관객에게 제안한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전쟁터 같은 집단일지라도, 시스템 안에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안정감과 위로를 보여주며 낙천적으로 세상을 그리지도, 비관적으로 던지지도 않고 관객의 삶을 감싸 안는다. 하지만 전시의 말미에 우리에게는 작은 의문이 남는다. 재료분리대로서 살아가는 작가에 본인에 대한 질문이다. 서로 다른 재질들을 존재할 수 있게 매개하는 재료분리대, 그러나 한편 재료분리대는 정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저 양측을 매개하며 존재할 뿐.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어딘가에 담길 수 있다는 것의 기쁨과 안정-그리고 필연적으로 함께하는 불안-에 대해 노래하고 있지만, 정작 작가 자신은 스스로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재료분리대에 빗대고 있다. 작가는 언제나 관객의 또 다른 초상이다. 중간자로서 남아있는 작가의 모습은 그 자체로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세상을 부유할 누군가의 모습을 비추고 있을지 모른다. 재료분리대로 남은-그리고 그 자체로 의미를 찾아 살아가는 작가의 모습이, 이 전시를 통해 위로받는 어딘가에 소속된 모두와 그리고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누군가에게도 위로로 닿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 우리 모두에게 ‘있을 곳’이란 어떤 의미일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본다.